THE KINKS – Give The People What They Want(1981, Arista)

THE KINKS – Give The People What They Want(1981, Arista)

Biography
출처 <핫뮤직>

비록 Kinks가 60년대 초반부터 뛰어난 창작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는 하였지만 고향인 영국에서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의 성공에 가려서 오랫동안 무명생활을 했다. 오랜 기다림 속에 그들은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 록계의 가장 훌륭한 밴드중 하나로 명성을 쌓았다. 20년 후에도 많은 개인적, 음악적, 상업적 위기가 있었지만 전세계적으로 많은 팬들로부터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초기 멤버는 Ray와 David 형제로 둘다 런던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런던 아트 스쿨을 다니는 동안 음악은 여가 시간에만 할 수 있었지만 10대 초반부터 기타를 연주하고 곡을 쓰기 시작했다. 64년 그들은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Kinks를 결성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밴드에서 데이빗은 리드기타를, 레이는 리듬기타와 피아노를 맡았다. 드럼에는 믹 아보리가 합류했는데 그는 60년대 후반 영국에서 한창 유행했던 스키플 밴드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한 술집에서 데이비스 형제를 만나 새로운 그룹을 만드는데 동의했다. 베이스에 피터 콰이프가 합류하여 멤버 구성을 모두 끝냈다. (이들은 4인조로 출발했으며 몇년 후에 다섯번째 멤버를 맞이하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Kinks는 레코딩 계약을 하게 되었고 그후 십년간 몇개의 주목할 만한 싱글을 발표한다.(“Tired of Waiting For You.” “Til The End Of The Day.” “Waterloo Sunset.” “Dedicated Flower Of Fashion.” “Well Respected Man.”)
Repise 레코드 소속 시절 (65), (65), (66), (66)와 같은 앨범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레이의 “Face To Face”(아직도 영국에서는 뛰어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데이빗의 “Mindless Child Of Motherhood”,”Rats”, “Stranger”와 같은 곡들에서 나타나듯이 눈에 띄게 나아지는 작곡실력에도 그들의 인기는 점차 약해져 간다.
“Face To Face”는 영국과 유럽에서 싱글로 발매되어 잠깐동안 반응을 얻어냈으며 67년 1월 Reprise에서 발매한 앨범의 타이틀곡이 된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는 저조한 반응을 보였고 이후 발매된 두장의 앨범 (67)와 (68)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유럽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있어서 대부분의 도시에서 공연할때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 확실했는데 작은 공연이나 클럽에 주로 나타났다. 롤링 스톤즈나 크림, 비틀즈처럼 수만명이 아니라 수배에서 수천명의 관중을 위해 연주했다. 잠시동안 이들은 록계에서 사라졌다가 69년 영국의 TV쇼 ‘Athur’에서 레이 데이비스가 쓴 곡을 연주하며 완전히 복귀하였다. 그곡의 주인공인 아서는 중년의 나이에 영국 중산층 노동자였다. 그것은 사회속에서 그의 조직과 다음 세대에게 그들이 미치는 영향의 문제점, 많은 좌절에 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앨범은 과거 영국의 영광과 전통 (Victoria), 병역의 제한 (Yes Sir, No Sir),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지도자에 대한 도덕적 매력 (Churchill Says), 아서의 아이들이 외국에서 새로 출발하는 것에 관한 희망 (Australia), 현실도피 (Shangri-La), 세대차이 (Nothing To Say)와 같은 주제로 이루어졌다. 아서는 Kinks를 록그룹 가운데 최고의 자리로 올려 놓았다.

69년 중반에 베이스에 피터 콰이프가 존 달튼으로 바뀌었고 71년 피아노와 오르간에 왕립 음악학교 출신의 존 거슬링이 합류하여 70년대 초반 계속 명성을 유지했다. 아마도 그들 최초의 큰 히트는 페티수즘(이성의 옷을 입고 즐거워 하는 행위)과 동성애의 시도였을 것이다. 레이 데이비스의 곡인 “Lola”는 70년 영국에서 1위를 미국에서는 Top 10에 오른다. 는 71년 그들의 고향과 미국 앨범 순위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때쯤 그들은 상당히 원숙해져서 자신들의 경력을 결정짓는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작가 Tony Norman과의 인터뷰(1971년 8월 6일자 What’s On In London)에서 믹 아보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지금 공백기를 갖고 있다. 레코드를 발매하지 않고서는 어떤 공연도 하지 않을 것이고 유럽에서는 단지 공연 자체만을 위한 공연이 아니라 뭔가 홍보에 관한 일을 해보고 싶다. 거기에는 물론 비즈니스적인 선택도 있다. 우리의 레코딩 계약이 다 되었기에 메이저 음반 회사와 재계약을 할것이다. 우리는 고유의 레이블을 갖고 싶지만 그것은 2년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항상 연주만 하는 것이 스스로를 자멸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젊은 시절에 실수를 했다. 비지니스적인 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팝스타가 된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그러나 당신이 조금씩 나이가 들고 현명해지며, 그리고 가족을 갖게 되면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당신은 스스로를 살펴볼 시간이 되었음을 깨닫게 될것이다.”

그결과 RCA레코드사와 계약을 했다. RCA에서 발매한 첫번째 앨범인 (71)는 곧 차트에 오르면서 몇몇 주요 신문사의 평론가들에 의해 그해 최고의 앨범 후보에 지명되었다.
72년 그들 최고의 앨범인 에서는 싱글 히트곡인 “Celluloid Heroes”가 돋보이는데 명예의 덧없음에 관해서 침울하게 비판하고 있다.그동안 워너 브라더스에서는 초기시절을 회상하는 작품들을 묶어 를 발매했다.

73년에서 74년까지 레이 데이비스는 다양한 록 드라마 (73), (74)를 구성하여 RCA를 통해서 발매한다. 이어 데이빗 데이비스의 일시적인 그룹 탈퇴는 Kinks를 일단 주춤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쇠퇴하게 만드는 듯했다.)
그러나 레이는 다음해에 밴드에 완전히 복귀하여 라는 훌륭한 컨셉트 앨범을 RCA를 통해서 발매하는데 그 앨범에는 재능도 운도 없이 가수로 출세하기를 꿈꾸는 ‘Norman’이라는 이름의 허망한 영웅 이야기가 12곡의 노래로 이야기되고 있는 형식을 띄고 있다. 그의 아내는 결국 그에게 어리석은 환상을 버리고 세상을 현실적으로 받아 들이라고 말한다. 75년 두번째로 RCA에서 발매된 앨범인 를 위해 돌아온 데이빗 데이비스의 배느는 리드기타로 계속 남게 된다. 76년 RCA와 계약이 끝난후 그곳에서 베스트 앨범 를 발매했다. (80년 RCA에서는 또다른 모음집 를 발매하였다.)
그들은 Arista와 계약을 맺고 그곳에서 처음 발매한 에서는 특히 “Juke Box Music”과 같이 인상적인 곡들이 레이 데이비스에 의해 작곡되어서 담겨져 있다. 이어서 Arista에서 연달아 발매된 앨범들은 그들의 명성을 더욱 빛내어 주었다. 를 제외하고는 모두 골드앨범을 기록했다. 30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도 록 스타로서의 위치는 흔들리지 않는듯 하였다. 레이 데이비스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우리가 처음 출발했을 때부터 사람들은 Kinks를 오래 지속되지 못할 그룹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바보같은 60년대와 더러운 70년대를 살아남아 여기 지긋지긋한 80년대에 있다.”

히트앨범인 (84)를 마지막으로 Arista와 계약을 마치고 60년대 미국 팬들의 기호에 초점을 마추려고 시도하던 MCA가 그들의 네번째 레이블이 되었다. MCA에서 처음으로 발매된 모음집인 (86)은 다섯장의 베스트 앨범을 포함하여 25번째 앨범으로 기록된다. 이 앨범의 첫번째 싱글로는 데이빗 데이비스의 곡인 “Rock’n’ Roll Cities”가 발매되었다.
86년 멤버에는 보컬/기타에 레이 데이비스, 보컬/리드기타에 데이빗 데이비스, 키보드에 이언 기번스, 베이스 기타에 짐 러드포드와 드럼에는 Zombies에 있었던 밥 헨리로 구성되었다. 원래 드러머였던 믹 아보리는 84년 해고되었으나 “Rock’n Roll Cities”를 녹음하는 동안 잠깐 참여하였다.
레이는 아보리의 탈퇴당시 상황에 대해서 87년초 에 Rock Fever잡지의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믹과 함께 한잔 하면서 나가서 그에게 더이상 그가 우리의 밴드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내가 해본일 가운데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그와 데이브는 많이 싸웠다. 평소에 그들은 집을 함께 나누어 쓰기도 했지만 둘 사이에는 항상 심한 경쟁의식이 있었고 그것이 요인이 되어 제작 바로 전에 데이브는 그와 더이상 함께 있을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믹을 데리고 한잔 하러 나왔다. 그때 나는 운전을 하지 않았고 역에서 그를 데리고 자전거를 타고 술집으로 갔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 끝에 최상의 방법은 그가 그룹을 떠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믹은 밴드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것은 믹이 마지막으로 연주한 “Rock’n’ Roll Cities”는 데이브의 곡으로 이는 그가 작고한 첫번째 히트 싱글이었다. 믹은 우리의 스튜디오를 함께 썼기 때문에 사업적인 면에서는 아직 우리에게 속해 있었다. 그는 여러가지 일을 돌보고 나에게 급료를 주었다.”

그런 상황은 일종의 긴장감을 일으키게 했고 이는 밴드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데이비스 형제간의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갈등이 몇년간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는 가끔 Kinks의 해산을 우려하게도 했다. 가끔은 서로가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했지만, 그들은 늘 문제점을 해결하고 밴드를 유지했다. 물론 주도자는 레이 데이비스였다.그들의 장수비결에 대해 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이 세상과 세상이 어디로 흘러 가는지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잇는 것이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나는 내가 작곡하고 싶은 것을 사회 속에서 본다. 런던의 노동자 계급에서 자랐지만 나의 성공은 계급에 차별이 없었다. 나는 한발짝 떨어져서 사물을 관찰할 수 잇었고 그것들에 대해서 썼다. 나 자신을 작곡가나 가수로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단순히 R&B 음악을 연주하기를 좋아했고 그것이 우리가 해온 일들의 핵심인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