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Y IDOL – Rebel Yell(1983/1984, Yeh Eum)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Biography
출처 <핫뮤직>
짧은 금발머리, 문신이 든 팔, 맨몸에 가죽잠바를 입은 전형적인 차림새 등으로 빌리 아이돌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의 펑크(Punk) 록커의 모습은 대충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대표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1983년 미국의 대중음악지 크림(Cream)의 독자투표에서 그는 ‘올해의 Punk 뮤지션’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연예게의 일이 자주 그렇듯, 표면에 드러나는 모습이 전체를 다 말해주지는 않는 법이다. 개인적인 면모의 그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이차원적이고 방약무인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사려깊고, 여는 창조적인 타입의 사람과 다르지 많은 확실한 목표를 지향하는, 자신의 음악에 심각할 줄 아는 인물이다.

솔로 데뷔앨범을 만들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로큰롤러로서 내가 맡은 이 분야를 잘 해내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스타일이 펑크일지는 몰라도 나의 음악은 전혀 펑크가 아녜요. 하지만 펑크적인 태도는 갖고 있죠. 예를 들어 청중들에게 나아가 그 면전에다 냅다 소릴 질러대는 따위가 그렇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고함만 질러대는 게 아니라 익사이팅하고 짜릿한 액션을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임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나는 라이브를 연주하길 원하고 그 라이브때의 흥분을 레코드 속으로 올겨오고 싶어요.”

초창기의 그는 절망적이고 미래를 차단당한 모습의 영국 펑크 사조에 물드는 대신 보다 점잖은 70년대 아메리카 록의 영향 아래 그냥 쉽게 함몰될 수도 있었다. 윌리엄 브로드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빌리는 이렇게 회상했다.

“난 런던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미국에서 몇 년을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아일랜드 분이였기 때문에 미국에 친척이 아주 많았었죠. 난 그때 네살 혹은 다섯살 때여서 당시 생활이라든가 음악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이 안나요. 그냥 태풍처럼 휙휙 지나가는 조각 기억들 뿐이죠. 땅콩버터와 당근 샌드위치를 아주 좋아했고… 풍선껌에 대한 굉장한 집착을 갖고 있었어요.”

빌리가 성장기에 도달할 무렵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그의 친구들이 런던에서 상투적인 경력을 쌓아가고 있던데 반해 그는 그 런던 외곽에 자리잡은 원래가 중하(中下)류인 계층 속에서 커갔다.

“나와 같이 자라던 친구들 중 많은 부분이 처음엔 다 뮤지션 생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내가 썻던 곡중 하나는 자기와 같은 길을 걸으며 음악을 하고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기꺼이 희생시키려는 수많은 친구를 둔 사람의 이야기였어요. 그러다 어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 혼자 그 길에서 음악을 하고 있고 그 친구들은 모두 회계원이나 버스 운전사가 되어 있는 거예요. 요즘 생각하면 난 그때부터 변함없이 그길에 있어온 사람인 반면 그들은 결국 변하고 만거지요.”
“정말 그런 일을 택하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나를 비난하는 그들을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난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사람들은 꿈을 쉽게 포기해 버리지요. 너무 안된 일이예요. 꿈이야말로 진정으로 해야하고, 또 걱정을 하지 않을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십대 중반에 그는, 다른 이계통 종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록 뮤지션으로서의 행운을 찾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고출력의 싱어로서 런던내의 클럽들 멤버들로부터 신임을 얻었고 이것이 토니 제임스와 함께 결성한 제네레이션 엑스(Generation X)의 리드싱어로 주목을 끌게 되는 초석이 되어주었다. 그와 제임스는 밴드의 오리지널곡을 대부분 공동작곡했다.
1977년에 이 그룹은 더 후(The Who)의 “My Generation” 에 대한 answer song인 “Your Generation” 이라는 싱글로 약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곡은 ’60년대 록은 지나고 이제 새로운 스타일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주장하는 격이 되었고 그들의 데뷔 LP인「Generation X(크리샐리스 레코드사, 1978)」에 실리게 되었다. 하지만 곡 하나 갖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순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앨범은 또 하나의 히트 싱글 “Ready Steady Go” 를 수록하고 있었고 이곡은 곧 수퍼스타가 될 1960년대 영국 록계의 재목감들을 발굴하여 선보였던 영국의 록 프로그램을 예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노래 이외에 빌리 아이돌은 기타도 쳤다. 그러나 그는 Generation X식의 스타일에만 한정당하는 느낌 때문에 불평했다.

“무엇이건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에 관해서 노래를 쓰는게 당연하다고 난 생각해 왔습니다만 Generation X는 보통 웅장한 찬가 스타일만 선호하는 편이었죠. 이를테면 “Your Generation” 같이 와일드한 젊음을 노래하는 따위 말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빌리의 걱정들중 어느정도는 그들의 두번째 앨범「Valley Of The Dolls(크리샐리스 레코드사, 1979)」에 대한 팬과 비평가의 전같지 않은 반응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물론 영국의 록씬도 변화하고 있었다. Punk록에 대한 관심은 점차 잦아져 가고 뉴 로맨티시즘과 테크노 록 같은 조류가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초에 빌리는 어쨋든 솔로 전향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뉴욕에 머물면서 솔로 앨범에 실을 곡들을 만들기 시작했다.그때 그다지 그는 성급하게 몰아부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뉴욕의 클럽들을 둘러보며 때때로 게스트 뮤지션으로 그 무대들에 잠시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일을 하나씩 하나씩 처리합니다. 느낌이 오지 않을 땐 쉽게 덤벼들지 않지요. 난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영혼, 정신 같은 것을 심고 싶습니다. 흑인들이 말하는 소울의 의미가 아닌 나 자신의 소울 말입니다. Generation X 시절에는 그런게 없었어요. 나의 캐릭터를 표현하지 못했었죠. 솔로로 나선 후에 나는 좀 더 정직한 모습일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젠 완전히 나뿐이니까요. 와일드하고 거칠게 노래하는 것엔 질려버렸어요. 그것은 소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것을 하고 싶습니다. 난 사람들이 무개성적인 군중의 일부가 아닌 각각의 개체가 갖는 제각기의 느낌을 갖고 그것을 좋아해 줄 수 있기를 바래요.”
“사람들이 물건을 부수고 난폭하게 행동하는 것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하지만 목적이 없는 것이라야 하죠. 런던에서의 폭동은 누군가가 그 행위에 변명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난 생각합니다. 난 그런 변명거리를 주고 싶지 않아요. 엉망진창인 폭력은 나와 아무 연관도 없습니다.”

뉴욕에서의 체류는 그의 작곡 외관을 수많은 방식으로 농축시켜 주었다.

“난 사람들이 로큰롤 음악에 맞춰 춤추도록 할 수 있는 썩 많은 아이디어들을 갖고 있습니다. (70년대 후반의 수많은) 음악에 대한 내 불만은 그 흥겨운 곡들에 맞춰 실제 춤을 추긴 힘들다는 것이었어요.”

이말은 ‘펑크와 뉴웨이브 음악중 일부는 춤추기에 불가능하다’ 는 지론을 갖고 있던 영국 TV 방송국에 대한 가벼운 조소라는 느낌이 든다.
그들은 Generation X 의 “King Rocker” 로 자신들의 그 지론을 입증했다.
그는 춤추기 좋은 “Dancing With Myself” 라는 곡을 내놓으며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그곡은 뉴욕의 주요한 디스코테크들 사이에서 괄목할만한 인기를 획득했다.
이곡과 후에 싱글차트에 진입하게 되는 다른 히트곡인 “Mony Mony” 는 그의 첫 솔로 컬렉션인 미니앨범 《Don’t Stop》에 실려있다. 하지만 이 앨범은 다음 앨범인「Billy Idol(크리샐리스 레코드사, 1982」이 나타나기 이전까지는 판매고가 좋지 못했다. 여기엔 “White Wedding” 이 실려 있는데, 이곡은 디스코 차트 상위에 랭크되었다가 잠시 물러난 뒤 일년 뒤에 Top 40 차트에 다시 등장했던 넘버이다. “White Wedding” 은 그의 솔로곡 작곡에 무언가 특별한 느낌을 들여오고자 한 그의 의도를 실험하는 곡이기도 했다. 그곡의 내용은 실수로 혼전임신을 한 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는 소녀의 이야기였다. 빌리는 이에 대해 좀더 일반론적인 주제를 끌어냈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와 같은 가사는 사회적 제도라고 해서 항상 우리를 행복한 길로 이끄는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법을 잘 따르는 것은 화실한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해요.”

댄스음악으로선 너무 심각한게 아닐까? 그는 대답했다.

“모든 노래가 다 “I Want To Hold Your Hand” 같은 곡일수는 없잖습니까.”

1983년말쯤 그는 미국 LP 차트에 석장의 앨범을 올려놓았다.「Billy Idol」,「Don’t Stop」그리고 그의 두번째 정식 앨범이자 플래티넘을 획득한「Rebel Yell」이 그것이었다. 또한 그는 그해 Top10 싱글도 보유하게 되었다.그것은 “Eyes Without A Face” 였다. 그는 솔로 활동을 정통 Rock의 본질쪽으로 방향을 맞추었다.

“난 언제나 진짜 로큰롤 가수였어요. 그게 저의 본질이지요. 솔로활동을 시작하면서 난 기본으로 돌아왔고 아마도 예전보다는 훨씬 헤비해졌을 겁니다. 헤비메틀이 아니라 좀더 ‘의미가 담긴’ 뜻으로서의 헤비함을 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과 그밖의 다른 예술적 행위들로부터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기쁨을 맛볼 수 잇었으면 하는 희망에 특히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 제가 티셔츠 한 장을 직접 도안한다고 가정합시다. 나는 독특한 도형이나 선을 그려넣고 싶어할거고 그게 제대로 잘됐다면 아주 놀랍게 느껴질 겁니다. 마치 마법처럼요. 만약 사람들이 내 음악에서 그런 기분을 맛볼 수 있다면 저 역시 아주 기분이 좋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에서 뽑아낼 수 있는 느낌이라고 난 생각해요. 내 노래에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무척 금사할 거예요. Generation X 에서 난 한께를 느꼈는데 그것은 그 밴드가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죠.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한 앨범에서 좋은곡 두개를 얻었다면 그건 형편 없는 겁니다. 난 열 곡의 노래중 두곡만 괜찮은 그런 것은 내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싱글을 발매하거나 길게 편곡된 버전 앨범(EP)을 내놓는개 낫죠. 잘 할수가 있고 결과도 좋다면 EP앨범이라 해서 문제될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내가 스튜디오에서 늘 시도하는 겁니다.”

「Rebel Yell」의 성공 이후 빌리는 단순한 상업주의의 한단계 위에 자신의 예술을 위치시키려는 그의 생각이 다음 앨범을 만들기까지 걸린 2년여의 침묵에 의해 화제거리로 거론되진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기간동안 그는 무대로부터 떠나 있었고 이 상황은 수많은 소문을 제공했다. 아프다거나, 마약중독이라거나 심지어 죽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1986년 가을, 그가 레코딩을 재개하며 다시 돌아왓을때 그는 로스엔젤레스 타임즈지의 Robert Hilburn에게 놀라워하며 이렇게 말했다.(1986년 11월 30일자)

“음 제가 죽었다는 게 제일 심한 소문이었을 겁니다.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와같은 극단적인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그 소문이 떠돌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큰 히트를 낸 직후에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던 게 사람들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또다른 커다란 히트로 그 순간을 지속시키길 기대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나로선 전작과 똑같은 레코드를 만들기 싫었고… ‘Outlaw Call’같은 그런걸 말하는 거예요…생각을 추리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내 음악과 내 사생활요… 그리고 그것들으 시간을 요구했지요.”

그와 같은 공백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그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1986년도작「Whiplash Smile」은 플래티넘을 획득했다. “To Be A Lover” 싱글은 Top10 히트를 쳤고 “Sweet Sixteen” 을 비롯한 몇개의 다른 트랙들도 방송을 많이 탔다. 1987년에 그는 또 하나의 히트앨범「Vital Idol」을 크리샐리스 레코드사에서 발매했고 그는 여기서 싱글 “Mony Mony” 로 그의 첫번째 차트 1위곡을 소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