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앨범 UK Version.
Biography
클래쉬는 70년대 영국 노동자 계층 젊은이들이 느끼는 분노와 좌절을 전달했으며 도전 정신과 전세계가 안고 있는 압제, 폭력 같은 문제를 상징화 하면서 미래에의 희망을 꾀했다. 영국내에서만 반향을 얻는데 그쳤던 몇몇 영국 펑크 밴드들과는 달리 클래쉬는 여러 사회 젊은이들의 공감을 두루 얻어냈다. 노랫말은 노동자 계층을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들은 노동자 계층에서 그 근원이 찾아지는 영국의 초기 파시즘이나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해서는 맹렬히 반대했다.)
멤버들의 출신계층은 대부분 중산층이었으나 이들의 어린시절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클래쉬의 멤버들중 둘은 결손가정 출신이다. 기타리스트 믹 존스는 할머니와 심술궂은 고모들 틈바구니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고 어머니는 교사였던 니키 히든의 가정 역시 화목하지 못했다. 한때 그는 절도행각을 하고 깡패들과 어울리던 시절이 있었다. 만일 밴드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전과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얘기한 적도 있다.
레코드 회사에서 작성한 보도자료를 통해본 클래쉬의 초기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1967년 5월 런던의 세퍼드 부쉬 근교에 있는 한 조그만 불법 건조물에서 드러머도 구하지 못한 채로 리허설을 가졌다. 베이시스트인 폴 시모논은 베이스 경력 단 6주였다. 그는 브릭스턴의 황야 출신으로 부모님이 갈라선 뒤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며 장학금을 받아 예술학교에 들어갔는데 친구 하나가 그룹의 가입을 권유해 왔다. 기타리스트 믹 존스가 바로 그 친구다. 폴과 같이 브릭스턴 출신인 믹은 아버지가 택시운전을 해서 먹고 살았다. 믹이 여덟 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어머니는 미국으로 떠나고 아버지는 가출하여 할머니 댁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자랐다. 클래쉬가 만들어 진 뒤 그는 해머스미스 예술학교를 자주 드나들던 참이었다. 폴과 믹은 밴드의 싱어감으로 조 스트러머를 찍었다. 당시 조는 심심풀이 삼아 반은 용돈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런던의 술집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스트러머는 클래쉬에 들어가기 전에 101ers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는데 이 밴드는 50년대 스타일의 로큰롤 음악을 하는 밴드로 “Letsagetabitarrockin'”이라는 곡을 발표한 바 있었다. 스트러머는 “White Riot” “London’s Burning” “Guns On The Roof”같은 같은 뜨지 못한 노래들의 작곡에 참여하기도 햇었다. 스트러머가 초기에 영향받은 아티스트는 미국의 아방가르드 록커 캡틴 비프하트(Captain Beefheart)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캡틴 비프하트의《Trout Mask Replica》앨범은 자신이 열여섯 살 시절 일년 내내 끼고 듣던 유일한 음반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은 결성되고 처음 몇달간 벌어진 상황이다.
“원래 키스 리바인 이라는 기타리스트가 있었는데 결성되고 얼마 안되어 급한 볼일이 잇다며 그룹을 나와 런던 북부로 떠나 버렸다. 1976년 8월 그룹은 캠든 타운의 버려진 창고에서 재정비를 가졌다. 그뒤 테리 차임스가 드러머로 새로 들어왔고 밴드는 창고에서 맹연습을 가졌다. 그러나 연주를 펼칠 무대가 없었다. 로큰롤의 고향으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마키 클럽은 클래쉬에게 ‘펑크록 사절’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버니 로즈를 매니저로 맞아서 마침내 연주무대를 갖게 됐다. 하루는 공연이 유난히도 난잡스레 전개되어 무대로 병과 깡통이 마구 날아왔다. 드러머 테리 차임스가 여기에 질린 나머지 그룹을 나가고 말았다.”
테리 차임스가 나간뒤 후임 드러머를 뽑기 위한 오디션이 치루어졌다. 206명의 후보자들 중에서 Nicky “Topper” Hidden이 뽑혔다. 클래쉬는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을 얻지 못했으나 얼마 안있어 커다란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CBS 레코드사가 이들에게 상당한 금액의 계약금을 제시해 와 계약이 이루어졌다. 음향효과 담당자를 프로듀서로 하여 런던에 있는 CBS 3호 스튜디오에서 3주에 걸쳐 데뷔앨범《The Clash》를 만들었다.
12월에 예정됐던 펑크/뉴웨이브 영국투어의 오프닝이 취소되자 클래쉬는 자체적으로 ‘White Riot’이라는 공연을 기획하여 Buzzcocks, The Slits, Subway Sect와 함께 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 덕에 클래쉬는 영국내 언론 매체의 관심을 얻어냈고 데뷔앨범 또한 차트 상위권에 올라갔다.《The Clash》는 영국 앨범차트 12위까지 올라갔고 77년에는 싱글들이 커팅됐는데 방송에서는 제대로 틀어지지 못했으나 차트 28위까지 올라갔다. CBS 레코드사는 미국시장을 겨냥하여 다음 앨범의 프로듀서로 Blue Oyster Cult와의 음반작업으로 유명한 샌디 펄먼을 붙여 주었다. 대부분의 녹음작업은 런던에서 이루어졌으나 마무리 손질은 미국에서 행해졌다. 앨범발매에 앞서 CBS는 “Clash City Rockers/Jail Guitar Doors”(1978년 3월 17일)와 “White Man In Hammersmith Palais/The Prisoners”(1978년 6월 16일) 2장의 싱글음반을 영국에서 먼저 발매했다. 이 싱글들은 큰 히트를 거두지 못했으나 두번째 앨범《Give’em Enough Rope》는 1978년 11월 발매된 뒤 영국차트 2위까지 올라갔다. 이 앨범은 Epic 레이블을 통해 미국에서도 발매됐으며 1979년 초에는 첫 미국공연이 이루어졌다.
미국공연을 갖기에 앞서 클래쉬는 영국공연을 가졌는데 이때 매니저 버니 로즈와 사이가 틀어져 결별했다가 뒤에 80년대에 다시 손을 잡게 된다. 79년 2월에 시작된 북미공연은 캐나다와 미국의 주요도시들을 돌았는데 그곳의 평론가들과 팬들이 성원을 보내와 클래쉬는 힘을 얻었다. 클래쉬를 최고의 록밴드라고 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마구 몰아치는 연주와 열정은 여느 펑크/뉴웨이브 밴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을 전해주며 이들의 음악을 듣는 청중들을 만족시켰다. 클래쉬의 음악들에는 힘이 담겨 있었으며 몇몇 곡에는 레게의 느낌도 배어 있었는데 가사는 따로 접어 두더라도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록 음악의 흥이 느껴졌다.
히든은 1979년 3월 5일자 타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Sex Pistols와는 부류가 다릅니다. 무대 위에서 자해행위를 가해 사람들을 놀래키거나 하는 짓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나만해도 핀으로 코를 찔러대는 짓거리 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클래쉬의 첫 미국공연에 대해 타임지의 잭 콕스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클래쉬는 우아한 연주자는 아니지만 섹스 피스톨즈가 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재주있게 음악을 만든다. 이들의 사운드는 누적되는 폭력행위를 폭발시키고 이들의 노래에는 위협과 도전이 기득차 있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이들은 규칙보다는 분노, 절망, 폭력 등에 대해 노래한다.’
영국 이외 지역 팬들에게 있어서 클래시의 활력있는 편곡과 다중의 의미를 지닌 노랫말은 다른 펑크 그룹들보다 클래쉬를 한층 와 닿게 해 주었다. 미국에서도 이들의 데뷔앨범은 그런대로 괜찮은 반응을 얻었으나 골드 레코드를 기록할 정도는 못됐는데 그 이유는 방송 전파를 제대로 타지 못한 탓이었다. 두번째 앨범을 프로듀스한 샌디 펄먼은 이런 얘기를 했다.
“라디오 방송국과 레코드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뉴웨이브’는 위험 신호였습니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습니다. 테드 뉴젠트 이후 중서부 최고의 신진 하드록 밴드로 알려진 Tony And The Tuna Fish의 음반 같은 거나 방송을 탈만한 거죠.”
스트러머는 1979년 2월 3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디오 방송국 실무자들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들 이에요. 1954년 록 음악이 라디오 방송 전파를 탔을때 자녀들이 록 음악을 듣는 것에 대해 어머니들은 끔찍한 음악이라고 못마땅해 했죠. 그런데 그 자녀들이 자라 부모가 되서는 다시 자녀들에게 펑크 음반 같은 건 집에 들여놓지도 말라고 소릴 지르지요. 결국에는 그들 역시 그렇게 자멸해 가는 겁니다.”
북미투어를 마친 클래쉬는 영국으로 돌아와 새 앨범 작업에 착수하여 1979년말 CBS에서《The Cost Of Living》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영국차트 22위까지 올랐으며 79년 11월 24일에는 두번째 앨범의 수록곡 “Tommy Gun/ 1-2 Crush On You”가 싱글로 발표되었다. 66년에 바비 퓰러가 불러 히트시켰던 “I Fought The Law”를 커버한 곡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싱글로 발표되었는데 이 곡은 과거와는 달리 제법 방송전파를 탔다. 그해가 다 가기 전 CBS에서는 “London Calling/ Armageddon Time”이 싱글로 발매됐다. 1979년 미국에서는 Epic레이블을 통해 데뷔앨범《The Clash》가 더블앨범으로 발매되며 클래쉬의 명성이 급상승했다. 미국발매반에는 기존의 수록곡 열 다섯곡 외에 “Gate Of The West/Groovy Times”가 보너스 싱글로 수록됐다. 니키 히든도 드럼연주릃 했지만 Tony Crimes(Terry Chimes의 필명)가 아홉곡의 드럼연주를 했다. 롤링 스톤지는 이앨범에 대해 ‘펑크음반의 결정타’라고 평했다. 앨범내 대부분 수록곡을 쓴 존스와 스트러머는 주제와 리듬패턴을 구사함에 있어서 록의 반경을 넓혀 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1980년에는 Ep《Black Market Clash》와 뛰어난 신작앨범《London Calling》으로 미국차트에 등장했다. 또한 79년에 나온 앨범《The Clash》도 계속 히트 대열에 올라 있었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지지구축을 상징하듯 1980년 4월 17일자 롤링 스톤 지에는 이들의 기사가 커버스토리로 실렸으며 이후 대규모의 클래쉬의 콘서트가 치뤄졌다. 1981년에는 가 히트를 했다. 새 앨범이 나오기 전인 82년 여름 니키 히든이 갑자기 그룹을 탈퇴하여 오리지날 드러머 테리 차임스가 미국 공연 드럼 연주를 대신 해주었다. 이때의 미국공연은 새 앨범《Combat Rock》홍보의 일환이었는데 이 신작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이 앨범의 수록곡 “Know Your Rights”와 “Should I Stay Or Should I Go”가 초여름 미국에 싱글로 발매됐다. 두곡 모두 차트에 올랐으며 이후 발매된 “Rock The Casbah”는 유머러스한 뮤직비디오도 함께 제작되었는데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Top 10까지 올라갔다. 1982년에는 헤드라이너로 미국공연을 치르는 한편 그해 9, 10월에는 밴드 The Who의 미국공연에에도 특별 게스트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렇게 수퍼그룹의 지위를 쌓아 나가는 와중에 그룹 내부에서 멤버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해 1983년 믹 존스가 그룹을 나갔다. 1984년 1월에 가진 어느 인터뷰에서 스트러머는 믹 존스의 탈퇴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한때 믹은 내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파트너였죠.-그들은 클래쉬의 곡을 함께 만들어내는 작곡 콤비였다.-파트너 없이 일을 해 나간다는 것은 내게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헌데 그가 무관심해지기 시작했어요. 스튜디오 작업도 하기 싫어했고 투어도 꺼려했습니다. 그저 휴가 얻어 쉬는 거나 좋아했지요. 이제 그는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믹 존스의 탈퇴는 작곡 작업에 있어서 치명적인 손실이었음이 곧 명백하게 드러났다. 클래쉬를 나온 믹은 Big Audio Dynamite를 결성하여 85년 Columbia 레코드사를 통해《This Is Big Audio Dynamite》를 발표하여 86년에 베스트 셀러 앨범을 기록했다. 반면 클래쉬는 1985년말《Cut The Crap》이라는 새 앨범을 발표했지만 인기를 얻지 못햇다. 인기가 예전만 하지 못했던 것이다. 뒷날 스트러머는 클래쉬가 해산에 이른것은 믹 존스 보다도 자신에게 탓이 있었노라고 털어 놓았다. 그는 영국의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믹 존스 탈퇴 당시의 경위를 이렇게 털어 놓았다.
“1983년 버니 로즈가 다시 클래쉬의 매니저로 복귀했을때 이미 불씨가 일었던 것입니다. 믹과 버니는 서로 영 안맞았어요. 버니는 믹이 나쁜 사람이라고 내게 계속 세뇌를 시켰지요. 버니의 말이 전혀 얼토당토 않은건 아니었어요. 믹도 인정할 겁니다. 사실 믹은 다루기가 힘든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나도 성질없는 사람은 아니고, 그러다 보니 결국 믹을 내보내야 겠다는 생각도 들게 됐던거고.”
“믹한테는 몹쓸 짓을 한 거예요. 내가 믹을 중상모략했던 셈이니까. 그 사람이 마음을 넓게 써서 앞으로 다시 곡을 함께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린 서로 완전히 다른 영역을 관할하니까 서로의 스타일을 간섭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게 하는게 바람직하긴 하지만 간섭 안한다는건 사실 힘들어요. 둘이서 간섭 안하면서 같이 일해 나가는게 좋긴 하지만 힘들다는걸 깨달았습니다.”
1986년 초 클래쉬가 해체됐고 스트러머는 솔로활동에 착수했다.그는 “Love Kills”라는 곡을 만들어《Sid & Nancy》라는 영화에 삽입시켰다. 이 영화는 Sex Pistols의 베이시스트인 시드 비셔스가 1978년 여자친구 낸시 스펑겐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기 직전 사망한 사건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클래쉬의 해산을 마지막으로 앞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할 것이냐고 어느 기자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는데 스트러머는 이에 대해 펄쩍 뛰며 음악계를 떠날 생각은 없다고 부정했다.
“농담하는 겁니까? 이 조 스트러머가 런던에서 택시운전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 사람이 조 스트러머였어’하고 수군대겠죠. 나는 완전히 과거의 사람으로 파묻혀 지는거죠. 사람들이 ‘당신 조 스트러머 맞아요? 한땐 나도 당신 팬이었어. ‘하면서 지나친다면 참담한 심정이 들지 않겠어요?”(로스앤젤레스 타임즈 1986년 8월 9일자)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를 놓고 머리를 짜던 스트러머는 87년에《Walker》라는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음악을 삽입했고 Pogues의 미국공연에 리듬 기타리스트로 참여했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단지 휴가를 갖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다시 록 음악계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결정을 못 내렸어요. 사실 로큰롤에 대한 생각은 잠시도 멈춰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잠시 휴가를 갖는 것일 뿐입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1988년 1월 31일자)
스트러머는 Big Audio Dynamite가 86년 발표한《No 10 Upping Street》앨범을 프로듀스해 주기도 했으나 클래쉬의 재결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91년 “Should I Stay Or Should I Go”가 싱글로 재발매되어 영국차트 1위를 차지하며 클래쉬의 이름을 다시 한번 등장시켰다.
출처: 핫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