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앨범.
Biography
출처 <핫뮤직>
Tom Verlaine은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음악인으로서 70/80년대 영국과 미국의 로큰롤 음악의 방향 제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형 히트곡 배출이나 대규모 공연장의 성공적인 콘서트같이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지만 Verlaine이 만들고 녹음한 음악들은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하던 펑크/뉴웨이브 운동울 일깨웠다.
80년대에 관심을 얻었던 영국과 미국의 음악을 보면 Tom Verlaine의 초기 작품들의 영향과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부터 Tom Verlaine이 대중적인 성공을 꺼린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왕성한 창작열은 타협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1984년 9월 8일자 영국의 Sound와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은 명성에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히면서도 소속 레코드 회사가 좀 더 지원에 신경을 써준다면 굳이 이를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이름을 알리게 되는 거라면 관심을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홍보만 제대로 이루어 졌더라면 내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도 보다 많았을 것이다. (물론 그가 이끄는 Television은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얻어내긴 했지만) 그런데 나는 홍보지원이라는 것을 받아본적이 없다. (1982년) Virgin 레코드사는《Words From The Front》앨범의 홍보지원을 약간 해주긴 했지만 이는 런던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게다가 레코드사 사람들은 팝계에 신디사이저 붐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이 마당에 (신디사이저 연주는 싣지 않고) 기타연주만 담고 있으니 히트할 생각은 아예 포기한것 아니냐며 내게 불평을 해댔다.”
그는 어릴때 팝 음악이라든가 기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부모손에 이끌려 일곱살때 클래식 피아노 레슨을 받기는 햇지만 심포니 연주를 들으며 꿈나라로 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좀더 큰 뒤에는 모던 재즈에 흥미를 느껴 색스폰으로 모던 재즈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로큰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막 십대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그가 처음 관심을 가진 곡은 Rolling Stones의 “19th Nervous Breakdown”이었는데 당시는 곡의 음보다도 가사에 더 흥미를 느꼈다. 청소년 시절 그는 내성적인 성격에 수줍음을 잘 탔으며, 연약한 체구에 공부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눈에 안띄는 지극히 얌전한 학생이었다. 고등학교를 나온 1968년 8월 Verlaine은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 북부로 옮겨왔다. 이곳에서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지닌 십대 청소년들과 문학, 기존 인습에서 벗어난 생활방식,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팝 음악 같은 것에 막연한 흥미를 느끼는 젊은 청년들을 알게 되었다. Verlaine은 스트랜드 서점의 점원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틈만 나면 시를 쓰고 친구들과 연주를 하곤 했다.
1971년 그는 두명의 친구를 끌어들여 Neon Boys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Verlaine은 기타와 보컬을 Richard Hell이 베이스와 보컬, Billy Ficca가 드럼을 연주했다. Billy Ficca는 Verlaine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1967년부터 함께 연주를 해온 사이였다. Neon Boys는 얼마못가 해체되고 Ficca는 보스톤으로 가서 한동안 블루스 밴드를 전전한다. 밴드 해체뒤 Verlaine은 기타연주와 작곡에 더운 몰두하며 뉴욕에서 솔로로 활동하면서 동네 극장이나 친구의 아파트에서 기타를 연주하곤 했다. 1973년 10월 Verlaine은 자신의 공연장을 찾던 Lichard Lloyd라는 젊은 뮤지션과 합치게 된다.
“Tom이 하는 연주를 들어보니 그가 정확한 연주를 한다는게 바로 간파되었다. Tom이 지닌 이같은 재질을 내가 더 크게 키워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Ficca도 보스톤에서 돌아와 세 사람은 새로운 밴드를 만들었는데 멤버들은 밴드 이름을 어떻게 붙일까를 한동안 고심한 끝에 Television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다. Lloyd가 들려주는 밴드명 채택 배경은 이러하다.
“우리가 텔레비젼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이유는 미국내 모든 가정에 다 있는 존재가 바로 텔레비젼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집에나 다들 있을 정도로 흔하기 때문에 있는듯 없는듯 느껴지는 존재가 바로 텔레비젼 아닌가.”
Television은 1974년 3월 2일 뉴욕의 타운 하우스 극장에서 데뷰 무대를 가졌다. 그 직후 Verlaine은 Bowery 중심부에 위치한 록 클럽인 CBGB의 주인을 설득하여 일요일밤에 정기적으로 출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벌이는 인상적인 공연과 멤버들이 지닌 재능에 대한 명성은 삽시간에 주위로 퍼져 나갔다. 여류 시인이자 록 스타인 Patti Smith도
“Tom의 기타연주는 수천마리의 파랑새가 지저귀는 것 같다.”
고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1974년 Patti Smith는 “Hey Joe”라는 싱글을 발표하면서 Verlaine에게 백 보컬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1975년에는 베이스 연주자인 Fred Smith를 끌어들여 5인조로 늘어났다. Blondie에서 활동하다가 올겨온 그는 Verlaine의 밴드를 처음 봤을때 팬이 되어 버린 인물이다.그는 Television이 지닌 도전정신을 좋아했다.
“어떤 밴드들은 베이시스트와 드러머는 주머니에 양손 찔러 넣고 마냥 한가하지만 Verlaine은 베이스 연주자조차 멜로딕하길 원했기 때문에 뜻밖의 위치에 음표들을 배치해야 했다.”
고 그는 뒷날 회고한 바 있다.
밴드는 자비를 들여 “Little Johnny Jewel”이라는 싱글(8월 19일 Ork 레코드사 발매)을 발표한 뒤 레코드 회사 관계자자들의 관심을 얻어내고자 데모테입과 그간 활동지역 비평가들로부터 들었던 호의적인 비평문을 동봉하여 레코드 회사에 돌렸다. 1976년 초 Elektra레코드사 가 이들에게 다소의 관심을 보이는 듯 하더니 7월에 이들과 정식으로 레코딩 계약을 체결했다. 다음해 2월 Television의 데뷰앨범《Marquee Moon》이 나왔다. 이 앨범은 70년대 중반 나온 데뷔앨범들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이자, 70년대 최고 수작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밴드는 자국인 미국에서도 상당한 지지집단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영국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햇다. 1977년 초 피터 가브리엘의 미국공연 오프닝을 마친 이들은 5월에 영국으로 건너가, 스탠딩 룸 전용 공연장에서 공연을 치르며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앨범 역시 영국에서 높은 판매고를 기록하며 연말에는《Marquee Moon》앨범이 Sound지에 의해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되엇으며 Melody Maker지 선정 가장 촉망받는 외국 신인으로 인정받았다. 1978년 초에는 후속앨범으로《Adventure》가 나왔는데 Verlaine은 Richard Lloyd와 공동작곡한 “Days”를 제외한 전 수록곡을 작사, 작곡했다. 새앨범 역시 데뷔앨범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보다 영국에서 더 큰 반향을 얻어냈다. 앨범은 발매 일주일만에 U.K.chart top10에 진입했다.
이들의 앞길은 이렇듯 장미빛으로 비쳐졌지만 밴드의 내 외부적 상황은 미래를 낙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번째 앨범의 제작계획이 세워지기도 전에 해체를 맞이했고, Verlaine은 솔로활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의 첫 독집앨범《Tom Verlaine》(1979년 Elektra)은 그가 혼자서도 활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음을 입증시켰다. 그가 들려준 정열적이고 직선적인 기타연주는 닐 영(Neil Young)이나 그레이트풀 데드(Greatful Dead)의 제리 가르시아(Jerry Garcia) 같은 명 기타리스트의 연주에 비견될 수준이었다.《Tom Verlaine>은 대다수의 비평가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얻었으며 이러한 호의적인 평가는 후속앨범 《Dreamtime>(1981년 Warner Brothers)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 앨앨범을 홍보하기 위한 공연을 갖지 않았고 레코드사의 홍보활동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두장의 앨범은 상업적 히트는 거두지 못했다. 82년에는《Words From The Front》를, 84년 가을에는《Cover》를 내놓았는데 미국에서는 Warner Bros를 통하여, 영국에서는 Virgin을 통해 나왔다. 이 앨범들 역시 미국과 영국에서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얻었는데《Cover》의 경우는《Marquee Moon》에 비견되었다.
앨런 존스라는 평론가는 이 앨범에 대해 멜로디 메이커지 1984년 9월 1일자에서 ‘뛰어난 편곡과 예리한 감성에서 배어나온 흡입력 있는 정열에 깊이 매혹당했음을 미쳐 인식하기에 앞서 빼어난 작품들은 듣는이를 끌어당긴다. 이 앨범에는 솔직함이 있다. 개방성과 대담성이 매력적이고도 감동적으로 표현됐다.’라고 평했다.
한번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의 기자가 솔로 작품에 대해 그와 인터뷰를 가지며 자기성찰력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이 그렇다. 당신은 혹시 콜트레인의 영화 작품을 본 적이 있는가? 그 사람이 만든 영화는 뒤로 물러선다던가 승부를 겨룬다던가 하는 법 없이 지극히 내부적 상황에 치중한다. 모든 총체적인 감정은 점점 더 본질적으로 되어간다.”
“나는 항상 훌륭한 테크닉을 가진 이들을 존경한다. 밥 딜런의 초기 앨범에 담긴 다소 서툴게 느껴지는 포크 기타 연주 또한 좋아한다. 그의 기타연주가 서툴게 들리는 것은 연주실력이 엉터리여서가 아니고 단순한 동시에 난해하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번씩 내가 연주했던 지난 앨범들을 다시 듣곤 하는데 예전 앨범들을 다시 들을 때면 성적인 전율이 느껴진다. 리듬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성에 대한 공상에 빠지게 만든다. 기타에는 어떠한 쾌락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것 같다. 멜로디 말고 기타연주를 신경써서 들으면 긴장감이 풀어진다.”
그는 영국에 자주 체류했는데 위의 인터뷰를 가진 1984년 당시에도 그는 영국에 있었다. 그는 잦은 영국 체류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뉴욕은 이제 일하기에 적당치 못해서 거주지를 유럽으로 옮길까 생각중이다. 그런데 한가지 걸리는 것은 미국에서는 열광적인 기운이 존재하는데 유럽에서는 그러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그러한 것이 이미 생명을 다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국같은 경우는 황실제도의 존재가 그러한 것들을 매장시켜 버린것 같다. 지중해인들은 어떤지 알아보아야겠다. 모든것에서 손을 털고 시골에 파묻혀 사는 생활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1987년 영국의 레이블인 Fontana에서 다음앨범인《Flash Light》가 나올 당시 그는 영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앨범은 Television이 전성기에 발표했던 앨범들과 막바로 비교가 됐는데 그의 기타연주는 초기 솔로앨범들보다 한층 인상적이고 힘이 있었다. 90년에는《Kaleidsocopin’》을 발표했다. 91년 11월 그는 Television의 옛 동료 Lloyd, Smith, Ficca와 오랜만에 모여 잠시 앨범작업을 같이 하고 92년 글래스튼베리 페스티벌에도 참여했다. 이와는 별도로 같은 해 초 Verlaine은《Warm And Cool》이라는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