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HAM PARKER – Squeezing Out Sparks(1979, Arista)

GRAHAM PARKER – Squeezing Out Sparks(1979, Arista)

매혹적인 연주자이자 재능있는 작곡가인 Graham Parker는 1976년 70년대의 명작에 속하는 두장의 앨범을 발표하며 록계에 등장했다. 70년대 중반에서 후반까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던 선두주자 Bruce Springsteen, Van Morrison과 함께 분류되지만 그는 결코 미국내에서는 대중의 환호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밖의 나라에서는 그를 70년대 중반 이후 로큰롤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의 노공자 계급의 환경속에서 자란 그는 10대초부터 음악을 궁색한 직업의 탈출구로 생각했다. 그가 지닌 록에 대한 열정에 불을 붙힌 첫번째 그룹은 그가 막 13번째 생일을 맞았던 1960년대 중반에 활동한 Rolloing Stones였다. Los Angeles Times의 Robet Hilburn과의 대담에서 “음악은 언제나 내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학교에도 다녔고 이것저것 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일은 차트에 오르는 일이었지요.” 미국 흑인음악(Blues와 R&B에 근원을 둔)은 Stones와 그외의 다른 영국의 Blues-Rock 그룹들이 그들의 스타일을 형성시키는 확실한 근간이 됐고 그 또한 그런 형식에 열중하게 됐다.

그는 기타연주를 했고 Black Rockers라는 그룹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Deep Cut Three가 되어 Stax-Volt, Chess 그리고 유명한 Motown 같은 레이블에 소속된 R&B 아티스트들이 녹음한 노래들을 선곡해 연주했다. 물론 연주나 레코드 계약에 관한 기회와는 거리가 먼 무명 밴드들이 많았고 그가 초기에 조직한그룹을 포함해 대부분이 대접을 못받았다. 절망적이었던 그의 동료들이 걸었던 길을 걸으며 음식과 쉴곳을 구할 돈을 벌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면서 상황이 변하기를 기대했다. 그가 한 일중에는 과학실험을 위한 동물사육, 빵집직원, 유리창닦이 그리고 1970년대 초에는 영국 Surrey에 있는 주유소에서 가스를 넣어주는 일을 했다.

그는 자주 밤이나 주말에 있는 연주를 보러 갔고 가끔 그가 만든 노래로 데모테입을 만들었다. 그중의 하나를 Hope And Anchor라는 술집으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연주하는 록밴드들 중에 누군가가 들어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테입은 Hope And Anchor 빌딩에 레코딩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Dave Robinson의 주목을 받았다. 그 음악은 런던의 록음악 동호회의 여러 회원들과 연결고리를 갖고 있던 Robinson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Parker를 위해 지금은 없어졌지만 최고수준의 Brinsley Schwarz, Ducks Deluxe 그리고 Boutempts 같은 밴드에서 단련된 연주가로 구성된 연주가로 구성된 혁신적인 새로운 밴드를 만들었다.

Parker를 내세운 그룹 Rumors의 데모테입에 담긴 원곡들을 새롭게 연주했을때 Radio London의 “Honky Tonk”쇼 프로그램의 DJ가 되기에 충분한, 좀 껄끄러운 구석도 있었지만 정력적인 에너지가 있었다. 이러한 노출은 Parker와 Rumors를 미국에 본사가 있는 Mercury Records와 레코딩 계약을 얻게 했다. Nick Lowe가 제작한 그들의 데뷔앨범은 1975년에 발표됐다. The Rumors는 기타에 Brinsley Schwarz와 Martin Belmont, 키보드에 Bob Andrews, 베이스에 Andrew Bondar 그리고 드럼을 맡은 Steve Goulding으로 구성됐었다. 그들의 데뷔앨범 에는 “Nothing’s Gonna Pull Us Apart”, “Back To Schoolday”, “Gypsy Blood” 같은 에너지가 가득한 곡들과 뭔가 특별한 것을 지적한 “White Honey” 가 수록되어 있었다. 곧바로 같은 수준의 모음집《Heart Treatment》를 만들었는데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후에 영화 Betwwen The Lines에 쓰였다. 두장의 앨범은 부인할 수 없는 R&B였으나 Van Morrison의 멜로디적 요소가 섞여 있었고 주류는 거의 펑크반란에 대한 암시를 다루고 있었다. Rolling Stone지의 Dave Marsh와 John Swenson이 평하기를 “자기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의 제안도 거부한 Parker의 거칠고 열정적이며 갈구하는 듯한 앨범들이다. 이 두장에 있는 펑크는 그를 둘러싼 문화가 붕괴한다는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놀라운 암시다.” 라고 했다. 또한 1976년에 발표된 4곡짜리 Ep(원래 분홍색 음반으로 발매했음으로《The Pink Parker》라고 불렀다)에는 “Hold Back The Night”가 실려있다. 1976년말 Parker는 비평가들의 압도적인 찬사를 받을수 있었다.《Howlin’ Wind》는 로큰롤의 클래식으로 꼽혔다. Rooling Stone지는 Parker와 그의 그룹 Rumors에게 그해의 최고의 신인밴드에게 수여하는 Red Suspender Awards를 주었다.Village Voice의 그해의 비평단 투표인단에서는 그들의 데뷔앨범 2장을 2위와 4위로 뽑았다. 또한 밴드는 본국과 해외에서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Parker의 문제는 그런 엄청난 성공을 어떻게 뛰어넘느냐는 것이었다. 기다리던 그의 세번째 앨범《Stick To Me》는 레코드 회사의 전폭적인 홍보활동으로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이전의 앨범들처럼 완벽한 내용은 아니었다. 비평가들은 주저없이 평을 보류했고 그 실망의 합창소리는 1978년 두장의 앨범으로 발매된 라이브 앨범 《Parkerilla》와 함께 더욱 크게 울렸다. 1977년과 1978년 발표된 앨범들은 그다지 졸작은 아니었지만-1970년대 말까지 최고의 작품대열에 속해 있었으므로-록계의 관점으로는 그들이 1976년도의 걸작을 쫒는것 대신에 선두로 나서야 했다. 영국의 Melody Maker(1979년 3월 17일자)의 Michael Watts와의 대담에서도 알수 있듯이 Parker는 그런 상황을 부드럽게 지나쳤다. “사람들은 그런일이 자기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첫번째 혹평을 읽자마자 나에게 그런일이 생겼다는게 명확해 지더군요. 그리고 대처하게 됩니다. 그런일에 웃을수 있으면 좋으련만…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후에 다른 사람들도 겪게 되겠지요…그건 내가 금새 대스타가 되지 않은 것과 약간 관계가 있어요. 난 사람들의 생각을 상상할수 있죠. ‘오, 우리가 작은 실수를 저질렀구나. 별볼일 없는 아무 녀석에게 야단이나 치자.’ 난 몇몇의 비평가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았고 그건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Parker는 Mercury의 부당한 홈보지원을 통한 그 레이블의 방해공작을 이유로 불미스러운 결말을 맺고 Arista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1979년 Arista에서 처음 발표한 앨범《Squeezing Out Sparks》(1976년에 발표한 앨범들에 비해 좋지는 않아도 좋은 앨범이었다.)에 쏟아지는 비평과 싸웠다. 이 앨범의 “Protection”, “No One Hurts You”같은 곡들이 비평가들을 위해 수록되어 있었다. 미 전역이나 유럽 순회공연에서 새 앨범을 홍보할때 자주 이전 레이블을 모욕하는 곡인 “Mercury Poisoning”을 연주했다. 비록 초창기 발표 앨범이긴 했지만 앨범이나 싱글 레코드를 닫혀있는 AM 라디오에 방송할 수가 없었다. 추종자들은 늘어갔지만 순전히 말 뿐이었다. 그해말에 Village Voice지는《Squeezing Out Sparks》를 1979년 최고의 앨범에 선정했다. 1980년에 Arista에서 발표한《The Up Esculator》역시 좋은 앨범이었다. 앨범의 주제는 “Stupefaction”에서 자기만족에 반대하는 찬양의 노래에서부터 “Love Without Greed”와 “Endless Night”에서 욕망의 고통을 노래한 것까지 폭넓은 영역에 걸쳐있다. “Endless Night”의 백보컬은 다름아닌 Bruce Springsteen이었다. 1982년《Another Grey Area》가 나오기전 Parker와 그의 그룹 The Rumors는 해체했다. 분열은 자신들의 독립을 구축하려는 밴드의 끊임없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룹은 80년대 초까지 세장의 앨범을 발표했다.《Max》(1977년),《Purity Of Essence》(1980년 Stiff) )Parker는 “백밴드가 다른 사람의 앨범보다 자신들의 레코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때 그때가 헤어져야 할때지요.”라고 말했다.《Another Grey Area》의 경우 모든 곡을 세션 뮤지션의 도움으로 완성시켰고 1983년 Arista에서 만든《Real McCaw>도 마찬가지였다. 두 앨범 모두 세련돼 보이기는 했지만 이전 앨범들만 못했다. 1984년 Parker는 Arista를 떠나 Elektra와 계약을 했다. 다음앨범을 위해 William Wittman(Cyndi Lauper의 성공작《She’s So Unusual》을 맡아 제작하고 엔지니어로 일한 사람)과 손잡고 공동 제작자로 나섰다. Parker는 “난《Another Grey Area》에서 공동제작자로 자신 있었지만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어요. 비록 초보자라서 데시벨도 몰랐지만 내가 최근에 만든 몇장의 앨범보다《Sqeezing Out Sparks》같은 소리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985년 3월 Elektra에서《Steady Nerves》가 발매되자 그는 단언했다. “이 앨범은 내가 발전하지 못한다는 의혹을 떨쳐버릴 것입니다. 여기엔 내가 최그에 발표했던 앨범들에는 없던 소리가 들어있고…사람들은 듣게될 것이고 인정할 겁니다.” 비록 Rumors와 재결합한 것은 아니지만 이 앨범 때문에 그는 Brinsley Schwarz와 옛관계로 돌아갔다.지금은 Schwarz가 리드기타를 앨범에서 세션으로 활약했던 George Small이 키보드를, Michael Braun이 드럼을, Kevin Jenkins가 베이스 기타를 맡았다.1985년 순회공연을 회상하며 그가 말하길 “당신이 Graham Parker And The Shot라고 말할때 이미 어떤 리듬을 얻게 됩니다.” 라고 했다. 1987년 Parker는 RCA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The Mona Lisa’s Sister》를 1988년 4월에 발표했다. 그 앨범은 Parker와 Brinsley Schwarz가 공동 제작했는데 1970년대 그의 작품들과 비교될만 하였다. 1970년대 앨범 가운데 몇장은 록클래식 대열에 합류했다 1987년 8월 11일자 Rolling Stone지는《Howlin’ Wind》와 《Squeezing Out Sparks》를 20년간 발표된 베스트 록앨범 Top100가운데 포함시켰다. 출처 <핫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