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JOHANSEN – S/T(1978, Blue Sky)

DAVID JOHANSEN – S/T(1978, Blue Sky)

David Johansen의 첫 솔로 앨범.

발매 당시 New York Dolls 이후 그의 행보를 주목하던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밴드 멤버 대부분은 New York Dolls 해체 후 David Johansen과 함께 New York Dolls 시절의 곡을 연주했던 경험이 있다. Sylvain Sylvain이 몇 곡에서 공동작곡자로 참여하고 있다.

Band Biography
출처 <핫뮤직>

70년대 초 New York Dolls는 밴드의 기이한 모습으로 실력을 평가받지 못한 그룹이다. 그들에게 들려오는 것은 불명예 뿐이었으며 그들의 독특한 연주력은 평가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에 의해 그들의 음악은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후 New York Dolls가 활동정지를 선언한 1974년 이후 그들의 행적을 아쉬워 하던 팬들은 78년 데이빗 요한슨 (David Johansen)의 새로운 솔로활동을 반갑게 맞이하기도 한다.

데이빗 요한슨은 뉴욕의 스테이튼 아일랜드 태생으로 그곳에서 쭉 자라왔다. 알다시피 스테이튼 아일랜드는 로큰롤이 특별히 인기 있었던 곳은 아니었다. 데이빗은 그때를 다음처럼 회상했다. “나는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자랐다. 나의 형과 누나는 로큰롤에 빠져 있었는데, 내 나이가 4살쯤 되었을 때다. 나는 에벌리 브라더스(Everly Brothers)의 “Bye Bye Love”같은 곡을 따라 부르며 노래하길 좋아했다. 그리고 이후 본격적으로 로큰롤에 빠지기 시작한 때는 Gary U.S.Bond의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나이가 조금 들어 스스로 자신을 챙길줄 알게 된 이후부터 집에서 지긋지긋한 녀석으로 낙인찍혀 버렸다.나는 친구들과 그리니치 빌리지나 타임즈 스퀘어로 놀러가길 좋아했었는데 아무도 어린아이가 들어가는 것을 눈여겨 보지 않아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이후 십대가 되면서 음악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0대 후반 New York Dolls를 결성,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팬들의 반응에 놀라기 시작햇다. 관중으로 있는 많은 아이들의 거친 모습들은 마치 미친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들을 흥분시킬 만한 많은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공연이 펼쳐지는 댄스홀의 모든 아이들은 놀라우리만큼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매니아들이었으며 우리가 그들의 밴드가 된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우리의 연주는 뉴욕의 머서 아트 센터 (Mercer Art Center)에서 한밤중에 시작되곤 했다. 유머와 진지한 연주자세, 그리고 세상의 모든것을 경멸하는 가사는 일반적인 록밴드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양상을 띄고 있었다.”

많은 팬들의 형성으로 인해 New York Dolls는 머큐리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으며 곧 셀프타이틀 데뷰앨범 《New York Dolls》를 발표한다. 그러나 많은 공연활동 등의 홍보에도 그들의 음반 판매고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으며 이것 때문에 멤버들간에 개인적 문제를 야기시키게 된다. 자니 선더스(Johnny Thunders/guitar), 아서 케인(Athur Kane/bass),제리 놀란(Jerry Nolan/drums)과 함께 데이빗 요한슨(New York Dolls 시절에는 “H”란 이름으로 잘 알려짐)은 6인치나 되는 플랫폼 슈즈, 립스틱, 과다한 분장 등으로 영국 팬들에게 선보였지만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들의 용모에 혼동스러워 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클럽에서 연주하려고 들러갈 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클럽 매니저나 출연 계약을 맺은 에이전트사로부터 기회를 박탈 당하기도 한다. 한 예로 74년 로스엔젤레스의 록시 클럽에서 있었던 일인데 무례한 행동과 공연 예정시간에 도착하지 않아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됐는데 이 당시 상황을 데이빗은 그들의 매니지먼트사가 밴드의 홍보를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우리는 록시클럽 매니저가 얘기한 것처럼 공연시간에 늦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하던대로 행동했다. 우리는 단지 즐겁게 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들은 우리의 팬들을 어떻게든 얌전하게 만들려고 했다. 우리를 이상하게 보았으며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모욕을 당한것 같아 기분이 몹시 안좋았다. 예전에 시골에서 그런 경우를 당한 적은 있지만 이런 대도시에는 처음이었다.”

75년 New York Dolls의 해체후 많은 미디어에서는 데이빗 요한슨의 거취에 대해서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데이빗 자신도 음악계에 새로 진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77년 CBS산하의 블루 스카이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리차드 로빈슨(Richard Robinson)의 프로듀스로 앨범제작에 들어간다. 그의 셀프 타이틀 솔로 데뷔앨범《David Johasen》은 78년에 나왔는데 곧 영국과 미국으로 투어를 떠난다. 예전의 화려한 메이크업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독특한 의상도 입지 않은 채 음악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공연을 끝낸 데이빗은 이후 New York Dolls의 전 멤버였던 실베인 실베인 의 도움으로 2집을 만들게 되며 “Funky But Chic”, “Frenchett”, “Lonely Tenement”등을 발표한다. 새로운 앨범《In Style》은 79년에 발매되는데 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R&B, 소울, 레게에 영향을 받은 많은 곡들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중 “Melody”, “Swahheto Woman”, “Flamingo Road”를 대중에게 널리 알린다. 이 앨범은 그의 작곡 실력이나 레코드 뮤지션으로서 많은 발전을 이룬 앨범으로 평가받게 되며 판매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올려 소속 레코드사를 기쁘게 한다. 세 번째 앨범《Here Come The Night》은 음악적 발전을 볼 수 있는 앨범이었지만 예전같은 호평을 얻어내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곡을 전 비치 보이스의 멤버였던 블론디 채플린과 같이 만들었는데 “You Fool For You”, “My Obsession”, “Here Comes The Night” “Rollin’ Job”등이 그들의 작품이며 블론디는 이 음반에서 기타와 백킹보컬로 참여해 주기도 했다. 데이빗은 조롱하는 투로 자신의 세 번째 앨범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나는 이 앨범을 이웃인 윌리에게 바치겠다.우리가 새 앨범을 위해 아파트에서 리허설을 하고 잇을때(기타 두대, 베이스 한대, 피아노, 오르간, 드럼머신을 가지고), 윌리는 항상 말하길 ‘오우, 당신네들이 이사하는 소리가 들리는군!’ 나는 나중에서야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았는데, 그것은 시끄러운 소음을 만드는 우리를 작당해서 쫓아내려는 음모였다. 그래서 내 방의 문고리에 다음처럼 쓴 쪽지를 걸어놓았다. ‘이 방은 당신처럼 살기 위해 빌린 것이지 절대 스튜디오용으로 빌린 것이 아님.’ 결국 리허설 작업은 스튜디오를 빌려 작업했으며 순조롭게 작업은 진행해 갔지만 이말은 꼭 남기고 싶었다.”

다음 앨범인 라이브 앨범《Live It Up》은 미리 만들어진 곡을 새롭게 편곡해 담은 모음집 형식이 아니라 라이브 앨범으로 발매했다. 앨범에는 애니멀스의 곡들을 메들리로 만든 곡 “Build Me Buttercup”이 미국 차트에서 오랫동안 머물기도 한다. 80년대 중반 데이빗은 맨하튼 연예계에 진출해 버스터 포인덱스터(Buster Poindexter)라는 예명으로 여러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86년 3월까지 아무런 솔로앨범을 발표하지 않았을때, 머큐리 레코드사는 초기 New York Dolls의 곡들을 담은 앨범 《Night Of The Living Dolls》란 타이틀로 발매하기도 한다. 87년 데이빗은 RCA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Buster Poindexter》를 발표하며 미국 종단 투어를 펼친다. 이 앨범에 대해 데이빗은 이렇게 평했다.

“많은 나의 곡들은 나의 레코드에서 얻은 많은 다양한 장르에서 영향받은 곡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것들은 나의 록 콘서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후 예전 동료 두명과 함께 집 근처의 트램프(Tramp)라는 바에서 연주하며 많은 곡들을 만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연주하던 대부분의 곡들을 라이브에서 연주했으며 앨범에 수록했다. 이 앨범은 87년에서 88년까지 빌보드 차트에 머물기는 하지만 베스트 셀러가 되지는 못한다. 이후 88년 데이빗은 영화《Candy Mountain》에서 자신을 보여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