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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10 Punk77 IGGY POP(STOOGES)
  2. 2007/05/03 Punk77 MC5
James Jewel Osterburg가 본명인 '펑크의 대부' Iggy Pop은 디트로이트 동부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Ann Arbor근처에서 자랐다.
처음 고등학교의 스쿨밴드에 가입해 1964년 서프밴드 스타일의 Iguana로 유명해지기 시작하는데(정식멤버로 앨범도 발표했다.) 이때부터 그는 Iggy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음해에는 덴버 블루스 스타일의 밴드인 Prime Movers에 가입한다. 그러나, 다음해 다니던 미시간 대학에서 낙제하면서 시카고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전 Howlin' Wolf와 Paul Butterflied Blues Band의 드러머였던 Sam Lay에게 블루스에 대한 공부를 한다. Iggy Stooge라는 이름으로 디트로이트로 돌아온 그는 Doors의 공연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Chosen Few라는 밴드의 멤버였던 Ron Asheton과 Psychedelic Stooges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Iggy가 보컬과 기타를 Asheton은 베이스를 연주했는데 후에 Asheton의 형제인 Scott도 드럼 연주자로 가입한다.(Chosen Few에 가입하기전 Asheton은 Prime Movers에서 Iggy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The Psychedelic Stooges는 할로윈날 밤, Ann Arbor에서 데뷔공연을 가진다. 같은해 Iggy는 배우로서 데뷔하는데 지금은 거의 잊혀진 영화감독 Francoise De Monierre의 영화에 Nico와 함께 출연하기도 한다.
한편, 밴드에는 Dave Alexander가 베이스 연주자로 가입하고 Ron이 기타로 위치를 옮기며 이름을 Stooges로 줄인다. 이로인해 Iggy는 보컬과 무대매너에만 전념할수 있게 된다. Stooges는 1968년 A&R man인 Danny Fields(후에 Ramones의 매니저가 된다.)에 의해 Elektra와 계약하게 된다. 이후 2장의 앨범을 발표하게 되는데 (첫번째 앨범의 프로듀서는 John Cale이다.) 판매고는 별로였지만 후에 록의 고전으로 남게 되는 "No Fun", "I Wanna Be Your Dog"이 수록되어 있었다.

1970년에는 색소폰 연주자인 Steve Mckay가 가입하고, 첫앨범과 두번째 앨범 발표 사이에는 세컨드 기타리스트로 Bill Cheatham이 가입한다. 1970년 8월, Cheatham과 Alexander가 그룹을 떠나는데 그 자리는 Zeke Zettner와 James Williamson이 대신하게 된다. Iggy의 헤로인 중독 문제로 그룹은 오래가지 못한다. Stooges의 팬이었던 David Bowie는 Iggy의 회복을 도와주고 1972년 여름 런던에서 Iggy의 앨범《Raw Power》가 발표될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앨범은 Iggy And The Stooges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데 영국에서 적당한 뮤지션들을 찾지 못하자 미국에서 동료 뮤지션들을 불러오는데 Williamson은 기타를, Scott Thurston이 베이스를, 그리고 Asheton형제가 기타와드럼을 맡게 된다.

《Raw Power》는 펑크의 허무주의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곡인 "Search And Destroy"가 수록되어 있다. Iggy가 헤로인 중독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자 David Bowie와의 관계는 계속된다.(Bowie의 매니지먼트사인 Mainman은 Iggy의 헤로인 문제로 그에게서 완전히 손을 뗀다. 그는 약물문제뿐 아니라 지나친 자해행위로 정신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한편 상업적인 성공은 거두었지만 조악했던 라이브 앨범《Metallic OK》는 유일하게 프랑스에서만 발매된다.

Iggy의 라이브쇼는 음악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어떤 뮤지션들은 무대위에서 그의 자해행위가 연출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하였으나, 《SoIt Goes》는 그의 행위가 연출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Raw Power》의 다음 앨범인《Kill City》는 여러 세션 뮤지션들을 불러 녹음하는데 Iggy Pop And James Williamson의 이름으로 발표된다. 이 앨범에는 그외에도 Thurston, Hund, Tony Sales, Brian Glascock(전 Toe Fat의 멤버이자 후에 Motels에 가입한다.)등 여러 뮤지션들이 참가한다.

Stooges는 1974년, 다시 한번 해산하게 되는데 Ron Asheton은 New Order(영국그룹 아님.)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후에 자신의 그룹 Destroy All Monsters를 결성한다. 설상가상으로 Steve Mckay가 약물과다복용으로 사망하고, Dave Alexander도 알콜중독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Thurston은 Motels로 가버린다. Iggy는 이때부터 펑크에 심취하기 시작하는데 Iggy의 취향으로 볼때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Television은 "Little Johhnny Jewel"을 Iggy에게 바치기도 한다.).
1977년에는 Bowie가 프로듀스하고 자신은 키보드 연주자로 참여한 두장의 앨범《The Idiot》와《Lust For Life》가 발매되는데 Hunt와 Tony Sales가 참여한다.
이 앨범들에는 "Night Clubbing", "The Passanger",그리고 후에 David Bowie의 곡으로도 유명해지는 "China Girl"이 수록되어 있다. Iggy 또한 David Bowie의 앨범《Low》에서 백보컬로 참여한다.

70년대 후반 Iggy는 Arista 레코드와 계약하고 몇장의 앨범들을 발표하는데 전 Sex Pistols의 Glen Matlock과 Ivan Karl이 참여한다. 1982년, 그의 전기와 함께 Pretenders의 Chris Stein이 프로듀스한《Zombie Birdhouse》를 발표한 이후 Iggy는 음악계에서 잠시 사라진다. 레코딩 스튜디오를 떠나있는 동안 Iggy는 약물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결혼도 한다.

1985년 Iggy는 전 Sex Pistols의 기타리스트인 Steve Jones와 함께 새로운 앨범을 녹음하며 이후에도 그와의 작업은 계속된다. Iggy는 영화배우로도 나서는데《Sid And Nancy》, 《The Color Of Money》,《Hardware》,《Crybaby》에서 그의 모습을 볼수 있었으며, 텔레비젼 시리즈물인《Miami Vice》에도 출연한다. 1986년 Bowie가 프로듀스한《Blah Blah Blah》로 Iggy는 다시 음악계로 복귀하는데 호주출신의 50년대 록커인 Johnny O'keeper의 커버곡인 "Real Wild Child"는 처음으로 영국차트에 오르기도 한다.

이후 그는 Guns & Roses의 기타리스트인 Slash와 4곡을 공동작곡 하기도 하며 AIDS 환자들을 돕기 위한 자선앨범인 《Red Hot And Blue》에서 Debbie Harry와 듀엣으로 "Well Did You Evah"를 노래하기도 한다. 1991년에는 B-52의 Kate Pierson과 듀엣곡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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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d Information/G·H·I·J·K·L·M | 2007/05/03 16:04 | Punk77
글-임진모 <팝 리얼리즘 팝 아티스트>중에서

사회변동을 제창하려고 태어난 혁명전문그룹
혁명이 개개인의 껍질을 벗고 서로서로의 팔에 안기도록 추진하는데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듯 이 그룹은 전적으로 혁명에 바치는 그룹이다.
-존 싱클레어-
1967년 7월, 팝계에서는 이때를 흔히들 '사랑의 여름'이라고 칭하지만 미국의 디트로이트시에게는 '악몽의 여름'이었다. 자동차 공업도시인 이곳에서는 그때 흑인폭동이 일어났다.
디트로이트 경찰이 영업시간외 음주를 죄목으로 흑인 민주 집회에 참여한 74명의 흑인을 연행한 것이 발단이 된 경천동지의 이 사태는 분노가 폭발한 수천 명의 흑인을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를 비롯한 1만 6천명의 정부군이 동원되는 등 때아닌 전쟁을 방불케 했다. 총 2천2백92명의 사상자(42명 사망)를 냈고, 5천5백57명이 연행되어 수감됐다.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은 "우리는 어떤 국가도 빫아서는 안되는 폭력과 비극의 일주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폭동은 진화되었지만 디트로이트 흑인폭동은 몇 개월 후인 68년 4월 4일 터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건과 함께 '급진적' 사회운동을 폭발시키는 뇌관의 역할을 했다. 흑인 무장 단체인 '블랙 팬더즈'등 과격한 집단이 그 후 잇따라 결성되었고 대학생을 위시한 일부 양심적인 백인들도 흑인 운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68년 대학가에는 소요와 시위가 끊이질 않았다.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은 대중음악의 새로운 물결을 조성하는 분기점이 되기도 했다. 흑인 폭동을 계기로 흑인 음악인 소울(Soul)이 팝계의 전면에 부각되어 일련의 소울스타들(제임스 브라운, 오티스 레딩, 윌슨 피켓, 아레사 프랭클린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 흑인의 긍지를 외쳤다.
록음악은 샌프란시스코의 애시드록으로부터 영국과 미국의 기타 영웅들의 귀를 째는 듯한 날카로운 기타 사운드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자니 윈터, 듀안 올맨 등 영국과 미국의 기타 플레이어들이 선사한 록음악은 기본적으로 흑인 블루스였고, 이들로 인해 시카고 블루스의 거목들인 B.B.King, 머디 워터스, 하울링 울프, 그리고 존 리 후커등이 부활해 재평가를 받았다. 경찰과 최루탄에 결연히 맞선 대학생들은 '피압박인종'인 흑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었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저항정신과 파워가 실린 블루스 음악을 동시에 수렴한 그룹이 MC5였다. 지금은 거의 잊혀져 버렸지만(우리나라에서는 록팬들도 존재를 거의 알지 못하는 무명이다.) 이 시기의 록음악 성격을 정의하는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밴드다.
이 그룹은 바로 그 디트로이트가 배출한 그룹이었다. MC5는 'Motor City 5'의 약자로, '자동차 도시의 5인'이라는 뜻인데, 자동차 도시는 디트로이트시의 별칭. 폭동이 발발한 67년 그 해 롭 타이너, 웨인 크래머, 프레드 스미스, 마이클 데이비스, 데니스 톰슨 등 다섯 명의 디트로이트 고교동창생들이 의기 투합해 그룹을 조직했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격렬함을 보존하려는 듯 이 그룹은 오로지 '혁명'을 제창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혁명과 사회 변동에의 헌신이 이 그룹의 지향점이었다. MC5는 세상을 바꾸는데 잇어서 록 뮤직의 역할과 영향력을 신뢰했다. 이 그룹을 설명할때 꼭 함께 언급해야 할 인물이 있다. 이들의 매니저이자 정신적 지주인 존 싱클레어이다. 그는 블랙 팬더즈와 상통하는 백인의 과격 운동단체 '화이트 팬더 파티'를 결성한 혁명적 투사였다.
싱클레어는 '목적적'인 로밴드로서 MC5를 기획했다. 그는 '혁명이 개개인의 껍질을 벗고 서로서로의 팔에 안기도록 추진하는데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듯 이 그룹은 전적으로 혁명에 바치는 그룹'이라고 강변했다.

그들의 무대는 잔혹하고 악의적인 언어들로 가득찼다.그들의 록 뮤직은 증오의 음악(Hate Music) 그 자체였다. 혁명을 부르짖는 게릴라들이 따로 없었다. 데뷔 당시부터 그들은 미국 국기를 몸에 두르고 모독 일색의 혁명적 구호를 외쳐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록 전문지 <크림>의 레스터 뱅즈의 MC5 기술은 압권이다.

"그들은 디트로이트 출신이다. 그곳에 깃든 적의를 능히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MC5는 혁명과 연계되어 말뚝을 박은, 바스티유 감옥을 강습하는 신념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앨범 모두가 원시의 바주카포 들이다. 그들은 격렬하게 움직였지만 사회적 양심을 소유하고 있었다."

MC5가 수면위로 부상한 계기는 68년 8월 시카고에서 개최된 민주당 전당대회였다. 대학가 데모가 절정에 달했던 이 무렵 반전과 인권투쟁의 슬로건을 내건 대학생들은 이 대회장을 기존 정치에 대한 반대 시위의 집결지로 삼았다. (이피의 리더 제리 루빈의 말 "시카고로 가자! 우리는 미래의 정치다!")
MC5도 싱클레어와 함께 시카고로 갔다. 그들은 그곳의 시위 군중들 앞에서 혁명의 신념을 주창하고, 사기진작을 위해 블루스 기조의 강력한 록 사운드를 연주, 센세이셔널한 화제를 모으며 일대 주목을 받았다.
록 역사는 싱클레어가 MC5 콘서트에서 행한 밴드 소개 멘트를 가장 선동적인 사회로 규정한다. 싱클레어의 목소리는 쉰 듯한 흑인 설교자의 그것과 유사해 목소리로 이미 청중을 휘어잡았다. 얼마나 선동적인가를 보자.

"형제 누이 여러분, 저는 저기 바다처럼 넓게 손에 손잡는 광경을 보고 싶습니다. '손들의 바다'를 보여 주십시오. 저는 모든 사람들이 굉음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저기 혁명의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저는 작은 혁명을 듣고 싶습니다."

박수만 치고 있던 관중들이 서서히 함성을 지르며 동요하기 시작한다. 싱클레어의 선동은 계속된다.

"형제 누이 여러분! 우리 각자가, 우리 모두가 문제를 일으킬 것인가 아닌가, 해결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5초면 됩니다. 단5초, 지구상의 이곳에 여러분이 서있는 목적을 깨닫는 데는 5초가 걸릴 겁니다. 이제 '행동해야 할 시간'임을, '그것을 무너뜨려야 할 시간'임을 깨닫는데는 단 5초면 됩니다. 여러분! 증명할 시간입니다. 증명할 준비 됐나요? 준비됐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증명서를 드립니다. MC5입니다."

록 그룹 소개가 아니라 마치 시위 출정식의 연설에 가깝다. MC5는 혁명, 선동 이외에 '모독'으로도 제도권과 세차게 충돌했다. 69년에 선보인 데뷔앨범 <고통을 걷어차라>(Kick Out The Jams)의 타이틀 곡의 제목 뒤에는 강도높은 욕설이 붙었다. 'Motherfucker' 그것이었다. 'fuck'의 원조격인 컨츄리 조 앤 더 피쉬는 저리 가라였다. 이때문에 음반을 출반한 일렉트라 레코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일부 레코드소매상들은 이 음반의 판매를 거부했다. 그러자 MC5는 대비책으로 지하신문을 통하여 앨범 광고를 때렸고, 음반을 거부했던 한 레코드 매장의 창문에는 'fuck you'라 휘갈겨 써붙이기도 했다.
그때 싱클레어는 마리화나 소지 및 복용죄로 체포되 투옥되었다. 골치덩이 MC5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던 일렉트라사는 이르 빌미로 싱클레어와 그룹을 도중하차 시켜버렸다. 매니저와 소속 레코드사를 동시에 잃어버렸지만 '곤경' 속에서도 앨범이 차트 30위권에 진출한 것에 가능성을 본 애틀란틱 레코드사가 그들과 계약을 체결, 70년에 두번째 음반인 <미국에 와서>(Back In The USA)를 낼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비평가들로부터 헤비메틀의 고전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판매는 지극히 저조했고 차트순위는 137위에 머물렀다. 참고로 이 음반을 프로듀스한 인물운 훗날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매니저가 된, 당시의 록 평론가 존 랜도였다. 이듬해 발표된 <하이 타임>(High Time) 역시 걸작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결과는 영점이었고 숫제 차트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였다.

애틀란틱사로부터 계약을 해제당한 이들은 새출발을 기하기 위해 영국으로 향했지만 멤버들의 탈퇴로 곧 해산되어 버리고 만다. 혁명 제창은 그것으로 마감되었다.
MC5는 디트로이트의 정서에 걸맞게 귀를 째는 듯한 소음의 사운드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이념적 시각에서 혁명록 혹은 게릴라록이라고 불렸지만 사운드적으로는 '에너지록'으로 통했다. 리드싱어 롭 타이너는 MC5의 사운드를 '전지가 전기에 입력되듯 자신들의 전기 에너지가 감상자의 감가기관을 충전한다'는 뜻에서 '재감각발생기(Resensifier)라 명명한 바 있다. 평론가들은 MC5를 당시 태동하고 있던 '헤비메틀의 원조'로 규정하기도 한다. 디트로이트 폭동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MC5를 위시해 '이기 앤 스투지스',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등 시끄러운 헤비메틀 밴드 상당수가 디트로이트 출신이어서 디트로이트는 헤비메틀의 메카가 되었다.

MC5의 양날개 '시끄러운 사운드'와 '혁명적 메시지'는 70년대 말 지축을 흔들었던 펑크록 밴드들이 재발굴하여 기본틀화했다. 특히 혁면정신이 강했던 섹스 피스톨즈, 클래시 등 양국의 펑크 밴드들이 MC5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섹스 피스톨즈가 훗날 굴지의 레코드사로부터 해제를 당하는 잇단 수난은 이미 MC5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밟은 것과 다름없어 새삼 역사의 반복성을 실감하게 한다. 70년대 말의 펑크 폭풍으로 허공에 묻힐 뻔한 이 그룹의 이름은 다시 오르내리게 되었다. 80년대 초반에는 그드릐 앨범이 재발매 되기도 했다. 그레서 어느 평지는 '시대를 앞서갔다'는 의미에서 '60년대에 활동한 최초의 70년대 밴드'라 칭하고 있다.

MC5의 멤버들은 해산 후 제각기 음악활동을 전개했지만(특히 펑크 분야에서) 크게 주목받은 인물은 없다. 멤버 가운데 프레드 스미스는 80년 여성 펑크의 선두주자인 패티 스미스 와 결혼, 패티가 언급될 경우 가끔 곁다리로 끼고 있고, 코카인 소지죄로 옥살이를 한 바 잇던 웨인 크래머가 최근 그룹 '워스 낫 워스'의 싱글에 연주자로 이름을 내민 정도.
록계는 혁명에 헌신한 전대미문의 그룹 NC5를 보유함으로써 역사의 한 페이지만은 '진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존재는 사라졌지만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 MC5가 록계에 남겨준 무형의 재산이었다.

이지훈 (2003-08-13 13:48:09)
대단히 멋지다...60년대 최고 시끄러운 앨범이같다.

Dorchick (2005-07-23 07:10:05)
너무 시끄럽고 분노가 가득하고 선동적이어서 듣다보면 괜히 화가남.
그래서 몇번 듣다 말았음. 밴드가 의도한대로 혁명정신이 있어야 좀 와서 꽂힐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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